주말에 영화 ‘콘클라베’를 보러 갔다. 꽤나 재밌게 봤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샷 하나하나가 너무 멋있었다. 세상과 차단된 콘클라베라는 독특한 상황에, 가장 신성한 곳에서 벌어지는 세속적인 갈등이 변태적으로 계획된 색감과 구도 안에서 펼쳐지는 게 아주 취향 저격이었다.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독립 예술영화였고, 꽤 저예산으로 찍었다라더라. 뭐 여전히 수십억씩 드는 제작비를 마냥 ‘작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극장을 수놓는 블록버스터들의 제작비에 비해서는 작은 게 맞다. 대중에 대한 노림수가 너무나 명확한 영화들에 비해 꽤나 독특한 맛이 나는데, 전혀 나쁘지 않고 오히려 맛있다. 감독색이 짙은 영화들을 밀어주는 A24 같은 영화사가 대중의 관심을 스물스물 가져가고 있다. 재밌지 않은가?
변화하고 있는, 혹은 이미 변해버린 IP 지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 시대를 지배한 메가 IP들이 있다. 고무고무, 어벤져스 어셈블, 가라 피카츄, 익스펙토페트로눔, 데마시아 등등... 시간이 지나도 크~ 소리가 절로 나오는, 누구나 아는 씬들이 있다. 나도 여전히 쇼츠에서 마블 클립이 뜨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끝까지 본다. 그리곤 관련 콘텐츠를 타고타고 들어가서 라떼 그 감정을 되새김질하곤 한다.
비즈니스에서는 소위 다른 비즈니스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해자’를 만드는가가 중요한 요소다. 여기서 가장 큰 판돈이 걸린 곳은 주로 구조적으로 정의되는 역학적인 성격의 경쟁력이다. 더 낮은 가격, 더 많은 선택지, 더 강한 유통력, 더 좋은 기술력 같은 - 크고 중요한 것들이다. 이걸 누군가가 해내게되면 그는 ‘승자’가 된다. 모든 것은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그쪽으로 쏠리고 나머지는 망한다(쿠팡이나 다이소를 보자). 이는 특히 IT 플랫폼 비즈니스에서 극심하다.
하지만 취향의 영역이 묻기 시작하면 판의 성질이 달라진다. 경기의 스타일이 격투기에서 골프로 달라지는 느낌? 격투기에서는 직접적으로 경쟁해야 할 상대가 있다. 하지만 골프의 경우 남이 뭘 하든 나만 홀을 잘 노려서 공을 넣으면 된다. 사람들에게 먹힐만한 것만 만들면 된다. 팝스타와 인디음악인이 공존할 수 있고, AAA게임은 인디게임과 공존할 수 있고, 오늘의 집은 쿠팡과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IP 비즈니스야말로… 취향 비즈니스 그 자체다. 미니 IP는 태생적으로 메가 IP와 공존할 수 있다.
‘해리포터 세대’라는 말이 있듯이 메가 IP의 파워는 시대를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나 개인까지 속속들이 정의할 정도로 촘촘하진 않다. 우리의 피드는 메가 IP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요즘같은 시대는, 멜론 Top100만 순차재생하기에는 너무나 재미난 콘텐츠들이 많다. 해군의 거대한 군함들 사이에 생긴 커다란 빈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해적선들이 많다. 이들은 다양한 채널에 다양한 형태로 너무나도 접근성 좋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생각보다 더 재밌고 생각보다 더 자주 보이면서 우리의 시간과 의식을 더 많이 점유한다.
메가 IP가 가지는 강력한 이점 중의 하나가 자본에서 나오는 제작력이다. 블록버스터의 제작비, 아티스트들의 뮤비 제작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그 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등장했다. 콘텐츠 제작비용을 어마무시하게 낮출 수 있는 기술이기에 정말 많은 팀들이 시도하고 있고, 괜찮은 실험 결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내후년 정도가 되면 3~4인 사이즈의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기깔난 결과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웹툰 스튜디오 사이즈의 팀이 영화 스튜디오로 변모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메가 IP가 가지는 강력한 이점 중 또 하나는 자본에서 나오는 홍보력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의 시대가 되었다. 한때는 우리가 설정한 구독과 팔로우가 우리의 피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쳤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알고리즘이 신이고, 구독과 팔로우는 거기에 약간의 가중치를 더해줄 뿐이다. 이제 알고리즘들은 너무나 고도화되어서, 콘텐츠를 발행하기만 하면 알고리즘이 알아서 그것이 취향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홀이 어딨는지는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공을 괜찮게 치기만 하면 알고리즘이 알아서 공을 홀에다가 넣어주는 것이다. 이와 비례해서 단순한 Paid 마케팅의 힘은 줄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Winner takes all 하는 - 그리고 덩치들이 다 처먹는 경향이 심해지는 섹터들과는 반대로, IP의 영역은 오히려 새로 등장할 미니 IP들이 번성할 수 있는 대해적시대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쓰고보니 A24가 정말 잘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작은 팀, 혹은 1인으로 IP 대해적시대에 뛰어든다고 해보자.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 일러스트레이터나 만화가들은 이미 많이 해내고 있기에 뻔한 공식일수도 있지만, 다작이 정말 중요하다. 다작을 하는 이유는 반복개선과 의식의 점유를 위해서이다.
반복개선은 홀의 위치를 찾는 과정이다.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 공들인’ 콘텐츠를 만들 것인지 다양한 공을 날려본다.
‘어떤 방향으로’: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알고리즘 신은 우리의 콘텐츠를 최적의 오디언스로 이끌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곳이 안타깝게도 한줌단일 수 있다. 동일한 섹터에서도 주제나 포맷에 따라 반응이 다를테니, 미세조정을 해보며 우리에게 허락된 영토를 파악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들인’: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작은 팀은 대충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입질이 올 때까지 투자를 조금씩 늘려본다.
방향과 거리를 따지며 최적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딥러닝의 Gradient 탐색과 꽤나 닮았다. 다만 step size를 작게 시작하는 것이 딥러닝과 반대다.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더 나은 내용과 연출과 구성과 장비를 고민하는 것이 단순히 숫자 하나 더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을 위해서도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좋다.
의식의 점유라는 것은, 우리가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여러번의 유효타와 충분한 시간을 통해 ‘깊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 세상에는 콘텐츠가 너무 많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깊은 인상을 남기기 전에 떠내려갈 수 있다.
우리가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는, 우리의 활동이 없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찾는지로 아닌지로 알 수 있다.
이것이 계속 트렌드를 좆고, 이슈를 하이재킹하고, 챌린지를 따라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산만함을 준다.
유효타를 계속 뽑아내는 것은 꽤 어려울 수 있다. 시간을 줄이고 비용을 줄이고 수고를 줄여야 한다. 최대한 자동화를 하고, 템플릿을 만들고, 자신만의 라이브러리를 만들자.
그 뒤로는 사이즈를 키우면서 항해하면 된다.
결국 이것은 성장 임계점을 찾는 최소비용 콘텐츠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이런 일련의 탐색 과정 또한 어느 정도 자동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본냥 오리지나루 간다앗!
글 잘 읽었습니다! 떠오르는 지인이 있어 공유하기도 했어요! 감사합니다!!